
SHINE
행복을 꿈꾸는 수도원 (In the spirit of happiness. Page 83)
예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하나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함으로 자기 보호와 자기 이익에 대한 갈망을 끊으셨고 온 맘과 정신과 몸과 영혼을 다해 십자가로 자신을 못박은 죄인을 남김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고자 할 때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분노, 원한, 무분별 따위를 평화롭게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보게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깨닫게되며, 더 나아가 만물의 아름다움과 선을 의식하며 고통과 절망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의 관심과 촞점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많은 관심거리 들로부터 멀리 옮겨지는 것을 보게되고, 멀어진 그만큼 나를 둘러싸고있는 주위의 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와같은 태도의 변화는 우리의 감정과 소유해야 할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방해받지않는 사랑의 지혜를 얻습니다.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을 발견하면서 놀라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 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첫 열정에서 참된 열정으로,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감정의 불에서 헌신의 불로, 위를 향하여 계속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영광에서 더 높은 영광의 단계로 올라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는 만큼 우리를 차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제 자신으로 가득한 사람을 하나님은 채우실 수없습니다.
사랑은 나의 삶에서 무엇과 같습니까?
냉혹한 현실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사랑을 진실된 것으로 만들기위해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노력하지않는 한 사랑은 허무하고 차가운 이론의 언설에 불과합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 행동의 모든 태도와 기초는 흔들리며 허물어지고 맙니다.
확실한 행위를 통해서 사랑의 모습이 구체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랑하고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새롭고 무한한 방법을 생각하고 가시화하려고 노력할때, ‘보이는 사랑’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속에서 사랑을 위한 노력에 창조적으로 자신을 위탁한다는 것은 감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맞지도 않고, 갈등도 잘못도 거듭할 수 있지만, 그러나 참된 사랑은 언제나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모든 상황애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 좋은 것을 추구하며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성실함을 손상시키지 않고 존경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동정과 기지를 보이며 솔직하게 열린 마음으로 찾아본다면 문제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게 가능하다고?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
만약 사랑이 감정에 노예가 된다면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마음과 자유 의지의 활동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된다면, 사랑이 오로지 다른 사람을 향한 선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가능성을 향하게됩니다.
인종차별주의자, 동성애혐오자, 외모와 학벌, 겉모양으로 누군가를 경멸할때, 생김새나 용모로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때, 비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때, 우리는 얼마나 개방적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지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유대교나 카톨릭등 다른 종교인들에게 우리의 사랑은 무엇처럼 보일까요?
여기에는 자기 자신이 하는 일과 현실을 볼 수 있는 눈 (의식)과 빈틈없는 경계 혹은 절제, 그리고 자기훈련이 요구됩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의 50년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섬기고 신앙고백을 하는기독교계 (Christendom) 안의 후계자와 계승자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치니키 신부 (Charles Chiniquy)가 아는 성직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고전적인 자서전에서 자신이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겼던 교회, 즉 자신이 자라나 사제로 서품을 받았던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해준 한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책 중의 한 장의 기록에 따르면, 몹시 가난한 홀아비가 있었는데, 그의 유일한 재산은 새끼 돼지 한 쌍뿐이었습니다. 그는 본당 신부에게 죽은 아내의 영혼을 위해 미사(위령미사: 죽은자를 연옥에서 천국으로 보내는)를 집전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미사 비용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미사를 면제해 주길 거부한 신부는, 죽은 아내가 연옥의 불길 속에서도 자신을 구원해 줄 미사를 집전해 줄 신부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홀아비에게 상상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불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홀아비는 견딜 수 없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치니키 신부와 다른 사제 열세 명은 홀아비의 고해 신부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메인 요리는 육즙이 풍부한 새끼 돼지였습니다. 주인이 농담 삼아 홀아비의 새끼 돼지 중 하나라고 고백하자, 치니키 신부는 혐오감을 느껴 접시를 밀어내고 신부의 무정함을 질책했습니다. "주인의 재치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웃었던 본당 신부와 다른 손님들은 교회의 부패와 탐욕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종교 역사는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주님을 섬기는 우리가 성령의 시선에 마음을 열어 두기를 바랍니다. 이익과 영광을 탐하여 섬기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양심을 부드럽게 지키기를 바랍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의 50년” 중에서 (Fifty Years in the Church of Rome)
랜디 선생님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미국에서 자란 학생들과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그 사람이 공립학교를 나왔는지, 아니면 크리스챤 스쿨을 다녔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미국의 크리스챤 스쿨을 나온 학생들은 신학대학이나 신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연스럽게 성경의 교리에 대해서 토론하고, 또 그 깊이가 깊습니다.
랜디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교 교실에 가보았습니다. 10학년 학생들에게 “성경교리”(Biblical Doctrines), 11학년 학생들에게 “성경적 세계관” (Biblical Worldviews), 12학년 학생들에게 “윤리학” (Ethics) 교과서들이 제눈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한시간씩 학생들은 이런 좋은 수업을 받고 자랍니다.
조지아 주에서 사립학교(기독교학교를 포함)에 보낼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은 한학생당 1년에 $6,500입니다. 그것도 공립학교 교육수준이 낮은 지역에 살고있는 학생들에게만 적용이 됩니다. 보통 사립 중고등학교 학비가 1년에 $15,000~$20,000 정도로 생각하면 기독교 사립학교에 보낼수 있는 여력이 있는 가정은 얼마 안된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러한 이유들로 많은 기독교 가정은 홈스쿨(Home School)옵션을 택합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어릴적부터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 또는 세계관들중에서 그 하나가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따지고 보면, 그 많은 세계관들의 뿌리는 허상입니다. 근거가 없는 세계관들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가지 세계관 뿐입니다. 성경적 세계관과 그 외의 것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 이순간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며, 또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끝내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그 외에는 설명을 못하는 여러가지 이론들만 믿고,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랜디 선생님과 학생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을 믿으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가장 큰 속임수가 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 그 마음의 움직임을 알지 못한다면 말입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개인의 야욕을 속에 감출 때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십자가 목걸이를 매달고 다니면서 제어되지못한 생각과 욕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임에도 교회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의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끌려 믿는다는 감정을 말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은 이 세상의 세력 일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노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만을 염려합니다. 우리 자신의 종교적 실존을 검사하고 확인해야하는 일은 끊임없이 해야 할 종교인의 사명입니다.
기독교 종교는 두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무엇인지 그 대상으로서 아는 것, 믿음의 내용을 알고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이라는 환경속에서 일어나는구체적인 사건과 순간, 생각과 행위속에서 믿음이라는 행위 자체를 분석 검증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죄인으로서의 인간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필연성, 이유, 목적, 현재생각, 속사람의 욕구,믿음의 원인, 믿는 내 자신의 모습과 태도가 정당한가를 묻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의 할례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의 마음이 부드럽게 기경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상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가리키시는 삶의 여정을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한발짝 한발짝 옮길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광기어린 믿음의 고집에의한 것이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찾고부르는 믿음은 우리 자신를 변화시키지못할때 매우 위험한 광신이 됩니다. 목이 곧은 고집과 타성, 풍조와 의식의 껍질을 깨고 변화받아 새로운 생명을 찾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구원입니다.
성경의 내용이 바뀌어도 모를 수 있다
구글이나 정보를 찾을때 찾는 내용을 입력하시고 “-AI”를 입력하면 인공지는을 이용하지 않은 정보수집을 할수 있다고 합니다. 아직 저도 해보지는 않아서 그저 어깨넘어 들은 정보입니다. 과연 정보의 홍수 시대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된 알고리듬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기도 하고 지나가고 오래된 정보를 자연스럽게 믿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그런 위험 속에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써머타임이 해제된다는 잘못된 정보를 구글 찾기를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받아 몇명의 교우들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미 변경되기 전의 정보가 떠올라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혼돈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써머타임이 되면, 이제는 자동으로 컴퓨터나 전화등이 자동으로 시간을 바꾸어 버립니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도 모르게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약간의 편리함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시간도 날짜도, 예전의 기록도, 훌륭한 기록도, 범죄 기록도, 모든 정보가 한번의 한사람의, 한 기기의 클릭으로 변조되거나 지워져도 아무도 모를수 있는 그런 영화에서나 상상할수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것을 이미 아시고, 계획하시고, 준비해 두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성경말씀도 앞으로 온라인 선상에서 서서히 변질이 되는, 아니 이미 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경번역본을, 여호와의 증인에서 사용하는 성경번역본과, 해설등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없이 으리는 그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종이에 글씨가 인쇄되어 있고, 가죽이나 비닐로 표지가 있는 성경 책을 더 이상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라는 찬양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좋은 성경책을 하나 집에 구해 두길 권합니다.
기독교 금욕주의
인간이 본래 갖고있는 성 (sex)이라든가 다른 본능적 욕망을 마주 대하고 서는 대신, 또 그것을 통제하고 균형 있게 사는 법을 배우는 대신, 수도사들은 금욕 실천을 통해 인간 조건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병적인 시도를 해왔습니다. 즉 전혀 다른 본성의 존재가 되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고 시도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지혜를 갖추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인간본성을 통합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 금욕실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창조성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향은 기독교 신앙에서만 나타나는 것같지는 않고, 다른 종교에서도 불 수 있는 고질병같은 과도한 수행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질세계 안에서, 즉 일상의 다양한 정확속에서 우리가 씨름하며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질적으로 종교의 문제는 여러수준의 광범위한 정신세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전정한 종교는 궁극적으로 건전하고 건강함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마주한 현실과 육체의 완강함속에서 현실적인 방법으로 현명하게 영성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금욕적 천사와 같은 선과 순결을 열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현실과 육체의 완강함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통에 빠지는 책임을 육체로 돌리는 정신적 경향을 넘어서기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우리의 본능이 쇄도하는 유혹과 욕망의 물결에서 벗어날때, 전에는 우리 몸이 이런 정욕에 절망적으로 노예 되었던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허약해져서 마지막에 죽고 부패하는 것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란 괴로움이고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쯤으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더나아가 성경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영이 생명이며 육이 무익하는 말씀을 하셔서 마치 육체로부터 자유할 수 만있다면 고통과 유혹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유혹이며 무모한 금욕주의이고 하나님의 뜻에대한 오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육체적 인간성의 개화를 통해 성화를 실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체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가진 인생을 좋은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리고 통합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로 육체를 주신 것입니다. 은혜는 활기찬 우리의 육체와 완전히 조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육체적인 생명의 거친파도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를 부정해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우리가 육체를 받아들이고 훈련시키고 사용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물질세계 안에서 우리의 육체성 안에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봉헌, 산제물로 드림으로써 삶 전부를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때 올바로 생각할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무엇이든 깊이 생각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게 설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우리 뜻대로 사는 죄인으로 타락한 이후, 우리는 그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보이고 우리가 직접 체험한 것에 대해 어느정도 사고를 제대로 할지 모르지만, 다른 우리가 모르는 방대한 우주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생각도 안하고 사실로, 진리로받아들이는게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물질주의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관찰된 사실들을 통합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지시하는것이 인공 지능입니다.
인공 지능 (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성경을 교정하고 다시 쓸 날이 올것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우리에게 인공지능(AI)이 방대한 정보를 다 정리하고 반영하여 쓴 새로운 성경이 필요할까요? 성경적으로는 확실한 답은 '아니요'입니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과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AI가 새로운 "성경"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경도 쓸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쓰고 있고 교정하고 권장합니다.
인공 지능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공 지능은 절대적 진리로서의 권위도 없습니다. 또한 인공 지능은 주님의 몸인 교회의 영적 인도자가 될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범위와 규모가 확실히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에 대한 주권자이시며, 이 모든 것이 그분을 놀라게 하지 않으시며, 인간의 계획이 그분의 목적과 동떨어져 전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바벨탑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듯이, 기술을 사용하여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야망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쉽게 좌절시키실 수 있습니다.
I am the Lord, and there is no other, besides me there is no God . . . (Isaiah 45:5)
미국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들
지난 주에 미국과 한국 국가대표 축구 친선 경기를 보며 생각난 일이 있었습니다. 대학원 학생시절 유학나온 많은 한국학생들과 가족이 함께 모여서 한국과 미국의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같이 모여서 축구를 보며 응원하던중, 한국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유학오신분의 자녀중 5학년 따님이, 분위기를 살피더니, “아빠, 우리가 한국이야 미국이야?”라고 물어보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웃프면서 당황해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우리의 다음세대, 자녀들이 한번, 아니면 평생 생각하는 정체성의 혼돈, 또는 정립과정 입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연방수사국이 조지아주 사바나 현대차그룹과 LG 엔솔 합작공장을 급습해 불법체류혐의로 노동자를 체포하고, 그중 많은 한국인을 ‘체류 목적 위반’으로 일주일간 구류했다가 한국으로 내보낸 일도 지난주에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도 한인들 간에도 의견과 감정이 분분합니다.
지난주에 한사람의 증오로 인해 아빠와 남편을 잃은 어린 두아이와 젊은 엄마가 있습니다. 그 가족에게 기도와 위롤를 표하는 마음 마저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그 의로운 사람을 죽음으로 제거한것이 잘된듯이 총을 쏜 살인자의 이데올로기와 무의미한 폭력을 응원하는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옳은 것을 찾고 따르려고 애쓰는 선한자들이 오히려 조롱받고 무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와 다른 자를 증오하고 살인하는 죄악이 판치는 현실은 아담 시대 이후부터 있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믿고 알아야 하는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 같은 사람들로 보이지만, 영원한 천국 시민과 아닌 사람들, 이 둘밖엔 없습니다.
한국이 2대0으로 이기고 있으니까, 저의 5살 손녀딸이 엄마에게 그러더랍니다. “Mommy, I like the blues now. But they are losing” (엄마! 나 이제 파란색팀 응원할래요. 지금 파란색이 지고 있어요)
2025년 늦은 여름 수양회
“깨어있음(woke)”은 약 100년전부터 사용된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인식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어에서 유래한 형용사입니다. 이 단어는 1970년대에 정치적으로 사용이 되면서 백인들의 특권이나 노예 제도에 대한 배상과 같은 정체성 정치와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미국 좌파의 사상을 상징 하기도 했습니다. 약 10 년전 흑인에 대한 경찰의 총격 사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해시태그 '깨어있으세요 (#staywoke)'라는 표현이 시위와 트위터를 통해 다시 유명해졌는데, 점점 더 '깨어있음(woke)'이란 단어가 페니니즘 이나 LGBTQ 의 권리 주장등에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있으세요' 라는 표현은 진보적인 사상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고 , MZ세대 사이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단어가 오히려 보수와 일부 중도파에서 진보 운동을 피상적이고 진정성 없는 보여주기식의 행동주의로 폄하하는 비꼬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교회 안의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나요? 동성 결혼, 낙태, 트랜스젠더, 안락사 등과 같은 도덕적 문제들은 모두 죄라는 같은 문제의 다른 징후입니다. 진정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 점검, 발전시키고, 경건한 세대를 양육하는 법을 배우고, 점점 반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세미나에 참석합니다.
주제: The Key to Being Woke-Proof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비결)
강사: Ken Ham
장소: The Cove
하나님과 나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용당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랑이 어떻게 완전히 왜곡되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말은 소중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자존감을 높여 준다는 뜻이라고 수없이 배워왔다. 사랑이란 자신을 좋게 느끼도록 돕는것, 사랑이란 거울을 주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좋아하도록 돕는 것이다라고 세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에게 최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받아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또 맛보도록 지음 받았다. 그분을 맛보고 최고로 만족하며, 그럼으로써 온 세상에 그분의 가치를 퍼트리도록 지음 받았다. 사람들에게 모든 만족의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 좋게 느끼도록 지음 받았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놀라운 기쁨의 순간은 자기 만족의 순간이 아니라 자기 망각의 순간이다. 그랜드 캐니언의 끝자락에 서서 자신의 위대함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순간, 우리는 외부에서 오는 장엄한 기쁨을 느끼도록 창조 되었다. 삶에서 드물고 귀한 이러한 순간들 하나하나는 훨씬 더 큰 탁월함의 메아리, 하나님의 영광의 메아리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면 그분이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너무나 작은 존재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못 믿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우주가 너무나 광대하기에 인간은 더없이 하찮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구와 인간이라는 지극히 작은 존재를 창조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어디 있는가? 라고 한다.
이 질문 뒤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우주관이 있다.
우주는 인간의 하찮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인간을 작게, 우주를 크게 창조하신 목적은 자신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배우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분이 무한히 크고 강하고 지혜롭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배우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천체 망원경이 측량 못할 우주의 깊이를 더 많이 보여 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경외해야 한다. 우리와 우주의 불균형은 우리와 하나님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하나의 비유다. 이것은 축소된 표현이다. 그러나 핵심은 우리를 무가치하게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사랑받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사랑은 죽어 가는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특히 그분의 은혜를 보여 주기와 관계가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선한 행위를 사랑의 행위로 만드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과 희생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게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존재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전부를 다 가져도 하나님이 없으면 마지막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 (고전 13:3참조). 사람들이 영원한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랑하는게 아니다. 당신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존 파이퍼, 삶을 허비하지 말라 中]
연금술사 - 파울로 코엘료, 역자후기-
삶의 중요한 길목에서 내가 잘못된 길로 접어들려 할 때, 어떤 사물이 혹은 누군가가 ‘우주의 언어로’ 내게 그것을 일깨워주려 했지만, 나의 눈과 귀가 어두워서 그것을 식별하지 못한 것일 테니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바쁜 일상속에서 간혹 별빛이 비치는 오아시스 앞에 앉은 듯한 고요한 순간이 찾아와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의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예비해주는 귀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고, 남 보기에는 초라한 인생이라도 한 사람의 삶은 그에게는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역사책만큼이나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자아의 신화를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신화를 올바르게 알고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에는 우리의 눈과 귀가 쓸데없는 들에 너무 현혹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연금술사했던 말을 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워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You came from Heaven to Earth!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무시무시한 정글과 길들여지지 않은 황야가 배경인 얀 디 하르토그 (Jan De Hartog) 의 소설은 벳치(Betsy)와 주인공 브리츠-얀센 박사(Dr. Brits-Jansen) 사이의 대조된 삶을 치밀하게 탐구한 작품입니다. 거구에, 거만하고, 용감한 브리츠-얀센 박사는 마치 거인처럼 이야기 속을 활보합니다. 그의 열정은 나병 연구에 있습니다. 나병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어디에 숨어, 누구를 공격하는지… 그보다 나병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나병환자인지 진단할 수 있는 전문의 입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무균 병원과 이교도 마을에서 나병과의 전쟁을 벌입니다. 권력은 그에게 특별 임무를 허락했고, 그의 임무는 무슨 방법을써서라도 나병을 퇴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환자들을 따로모아 격리시키고 마을 전체를 불태웁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브리츠-얀센 박사의 모험을 숨 막힐 듯 읽다 보면, 그의 강인한 인성에 매료되면서도 동시에 그의 나병퇴치 방법의 잔인함과 악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벳치(Betsy)는 구세군 선교사로서, 신실한 남편과 함께 나병 환자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악한 삶에서 구원받았습니다. 브리츠-얀센 박사의 나병 퇴치 운동에 바친 것과 같은 무모한 결의로 자신을 내던졌던 삶 말입니다. 그녀는 끔찍하고 흉측하며 전염성 질병인 이 병의 여러 단계를 겪고 고통받는 나병 환자들과 함께 숲 속에 있습니다.
브리츠-얀센 박사의 목표는 어떠한 가혹한 조치를 통해서라도 나병을 근절하는 것이었고, 벳치의 목표는 불쌍하고 불행한 나병 환자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벳치는 그들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돌보고, 위로하고, 함께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도 그들과 똑같이 나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길고 긴 죽음을 맞이했고,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축복으로 남았습니다.
예배 마치는 축도를 안하는 이유
2025년이 시작한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벌써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벌써 새롭게 새해 아침에 결심한 몇가지 중에 2가지 항목을 지키지 못하고 벌써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변화를 주기란 정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대부분의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의 것이기에 더욱 힘듭니다. 결단과, 노력과, 불편함, 희생과 아픔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필요하고, 항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변화하기 싫을때, 주님께서는 강권적으로 변화를 할수 밖에 없도록 그러한 상황을 주시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중에 마치는 기도는 “축도”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축복 기도(라틴어: bene, '잘' + dicere, '말하다')는 일반적으로 예배의 마지막에 드리는 신으로부터의 도움, 축복, 그리고 인도를 구하는 짧은 기도입니다. 베네딕션 (Benediction)이라는 순서는 사실 미국의 침례교회에서는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모든 믿는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원은 목사나 사제에게만 있는 권위가 아니라, 모든 믿는 백성들에게 어느 중간 매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 주시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제사장같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권위 행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사 안수 시취를 받을때에 시취위원 한분이 목사가 되면 갖는 특권이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축도를 할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굳이 따지지 않고 “네” 하고 지나갔습니다.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의 부친 목사님도, 또 많은 한국교회 목사님 께서는 항상 예배를 마칠때 두 손을 들고 축도를 하시지만, 저의 부친도 침례교회 목사로서 이것이 잘못된 전통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저의 부친과 축도에 대해 이야기 할때에 미국침례교회에서는 결혼 안한 처녀에게도 베네딕션을 부탁한다고 제게 여러번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를 마치는 기도를 안하기도 하고 그냥 파송의 메세지를 선포하거나, 찬양을 함께 부르고 모임을 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제사장제도가 이제는 예수님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은 더 이상 제사장 코스프레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도들도 ‘제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을 그만 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찬양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옵니다 (로마서 12:1-2).
축도는 한국의 교단을 대표하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또한 교인들의 복을 구하는 무지함으로, 전통으로 내려 왔습니다. 예배의 다른 순서는 다 빼먹어도 축도는 받고 가라는 말도 자주 합니다. 무언가 일주일 동안 잘 풀릴것 같은 느낌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부터 목사님의 높이든 손바닥을 통해 신비롭게 나에게 부어질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오늘 말씀(사도행전 21장 1-15절)에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는 변화를 준비하고 선택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전통에 안일하게 빠져있으며 깨닫지 못하는 삶을 안타까와 합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그 무지를 바로 잡아 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면서 우리 삶의 변화에 대해서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20장의 “유두고”
젊었을때 저는 교회에 모여 예배도 드리고 성경공부와 친교에도 참석하고 했었지만, 항상 세상에 눈을 두고 있었습니다. 모임이 끝나면 곧 세상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즐기고 시간을 보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도 세상것이 좋아보였고, 흥미로웠으며, 제 안에 호기심을 끌어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의 기록은 예전에 저를 돌아볼수 있었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 (Troaz)에서 밤 늦게까지 강론하고 있었을때, 윗층 창문에 걸터 앉아 있던 유두고가 떨어져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록입니다.
창문가에 앉아 있는 위치는 세상과 신자들의 교제 가운데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관경은 늦은 밤의 바쁜 거리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부산하고, 정말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앉아서 귀로는 웅성웅성 바울 선생의 강의가 들리는지 흘리는지 했지만, 창문 밖의 거리에 있는 네온싸인과 화려한 모습은 젊은 유두고와 같은 우리들에게 포기하기 싫어 붙잡고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젊은 유두고와 같은 형제 자매들을 많이 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업과 직장안에서, 자녀교육 문제와 갈등에서, 세상의 화려한 모습이 흥미롭고 눈을 떼기 싫은 마음으로 창문가에 걸터않아 밖을 내다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문가에 앉아 졸고 계시더라도, 바울의 강론에 참석한 유두고는 복이 있는 자 입니다. 떨어져서 죽었어도, 바울이 내려가 안고 생명을 되살리는 기적이 그에게 일어날수 있는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새기까지 다시 말씀을 듣고, 모인 모든 사람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베푸는 유두고와 같은 사람, 저말고 또 있으신지요?
예수 안에서의 진정한 쉼 (안식)
창세기 1장 말씀으로 2025년을 시작했습니다. 샤인 교우들외에도 몇분의 친지들과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며 말씀을 보내드립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창2:1-2) 말씀하십니다.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든지, 천지의 창조는 “다 이루었다 (Complete! Finished!)”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을 생각합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20)” 에덴 동산에서 시작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회복되는 일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아직도 그 복음을 듣고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또 그 일을 위해 먼저 구원받은 우리들이 복음을 나누는 일이 계속 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야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셀수 있거나, 이해할수 있는 우주보다도 많은 우주를 만드실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물질적인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분의 에너지를 이 우주안에 간단하게 집어넣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아름답고 보기에 좋다”고 하시며 안식을 취하십니다. 물론 그 분이 정하신 안식은 얼마 안가서 죄로 인해서 깨어지고 그분의 구속(회복)사역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요 5:17). 온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쉼에서 깨어서 아주 작은 잃어버린 한영혼을 위해 오시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도 없이 놀랍기에,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합니다.
오늘을 사는 믿는자들은 특별히 정해진 날을 기념하며 안식을 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종교 의식적인 쉼이 아닌 진정한 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쉼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2025년 입니다.
새로운 2025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결심하셨던일, 준비하신 일들이 어떻게 열매를 맺으셨는지요? 저는 그리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인생의 어떤것이던, 어떤 이유와 핑계이던, 제가 계획한대로 온전히 되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저의 경험에서 거의 완벽하게 계획한대로 진행되는것은 직장에서 준비하고 계획해서 이루는 실험과 그 결과가 가장 그래도 계획한대로 나오는걸 체험합니다. 가족과 이웃과 관계에서, 기도와 말씀묵상의 계획과, 사역과 삶속에서의 계획은 절대로 계획한대로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또 어떻게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고 되는대로 살아가신다고 합니다. 또 이제는 은퇴해서 그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것이나 새로운 결단은 안하신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앞날에 대하여 아무 계획없이 사는 사람들은 분주해 보이지만, 실제로 바쁘게사는 사람은 아니며 게으르고 규모없이 살아서 일만 많이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데살로니가 후서 3:11).
우리는 한해를 보내면서, 또한 새로운 한해를 맞으면서 새로운 계획도 세우고 결단도 합니다. 우리 삶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성취도나 결과는 그분께 맡기고 자유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과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 가십시다. 하나님이 이 온 우주를 아주 작은 세밀한 부분까지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계획과 그 안의 섭리는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주의 만찬'이라고 불러봅니다.
우리가 믿는 교회의 모임에서는 2가지 의식, 또는 예식,(ordinance)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자의 침례 (Believer’s Baptism)와 주의 만찬 (Lord’s Supper)입니다. 그 의식을 누가 집행, 인도 할수 있느냐를 생각해 볼때 성례전주의 (Sacramentalism)와 성직자주의(sacerdotalism)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성례전주의자도 아니고 성직자주의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의에 따르면 성례전주의는 성례전 (Sacrament) 이 구원에 필요하거나 영향을 준다는 교리입니다.
침례교인들은 믿음을 도구로한 은혜에 의한 구원을 얻는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침례나 주의 만찬을 구원에 영향을 주는 방편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침례교인은 성례전주의가 아닙니다.
둘째로, 우리는 성직자주의도 아닙니다. 성직자주의는 성직자에게 특별한 신권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성직자(priest)라는 표현은 다른 기독교나 기독교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로 평신도와 구분해서 다른 거룩한 목적을 위해 구분된 (주로 안수를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침례교인들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으로 알려진 교리를 고수합니다. 이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며,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고,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중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확신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4-5, 9; 요한 계시록 1장 5-6절)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모든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언제든지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직접,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렇다면 누가 의식을(주의 만찬과 침례식)을 집행할수 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세대를 생각하면서...
2023년 조지 바나의 조사에 의하면 성경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상 아주 기본적인 복음주의의 신앙이며, 아주 구체적이거나 심도있는 내용들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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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고 공의로우며 창조주이자 세상의 영원한 통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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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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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즉 우리의 죄 고백과 그분의 용서를 의지함을 통하는것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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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도덕적 지침이 되는 참되고 적절하며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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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존재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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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의 목적이 “온 마음과 영혼과 힘과 뜻을 다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 임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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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한결같은 순종함으로 이해한다.
그래도 25년 전에는 미국내에서 위의 7가지를 믿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12%였는데2023년도에는 겨우 4% 밖에 되질 않습니다. 특별히 젊은 층에서는 (18-29세)에서는 1%밖에 되지 않는다고 조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18-23세 사이에서는 0.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200명중에 1명만이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학생들은 199명의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친구나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성경적 세계관을 지켜나가야하는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항상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도전을 받고, 조롱을 받고, 타협을 해야하는 홀로서기의 삶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0.5%라는 수치는 이란이나, 방글라데시,심지어는 태국이나, 일본, 북한에 비교해 더 낮은 수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교회만 봐도 학생들도 청년들도 많이 있는데, 뭔가 잘못된 설문 조사가 아닌가 생각할수 있지만, 사실은 그들도 어쩔줄 몰라서 그냥 교회에 모이는 수준이고, 언젠가는 신앙을 포기하거나, 교회를 떠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다른이에게 논리 있게 설명할수 있는 준비도 안되어있고, 밖으로는 진화론, 유물론적인 세계관의 논리가 오히려 맞게 보이는 199명의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서 직장생활도하고, 사업도 해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위의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은 사람은 20% 밖에 안된다고 바나 리서치 그룹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날을 기념하며 축하합니다!
지난 한주는 매년 한번 기념하는 “선생님 감사 주간 (Teacher Appreciation Week)이었습니다. 작년 선생님의 노고를 감사하는 모임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자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 같은 건 없어요.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아이들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그럴싸 하고 모든 아이들을 위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바이든 대통령은 어느 한 선생이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고립시켜 ‘보호’라는 명목하에서 한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교사의 발언의 목적은 매우 반-성경적이며, 아이들과의 전쟁, 가정에 대한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전쟁입니다. 어머니! 우리 아이들은 대통령이나 정부, 이웃이나 교사의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속해 있고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책임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그들의 부모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양육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녀들의 영적인 양육이며, 이는 그들의 영원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트랜스젠더 가시화의날’을 기념하며 바이든 대통령이 대국민에게 보낸 메세지는 “내가 여러분을 볼때,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당신은 존경과 존엄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싸한 성경말씀을 인용한것 같지만, 창세기 1장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남자’와 ‘여자’라는 두개의 확실한 성별의 사람을 만드셧습니다. 말씀을 확실히 알고 확실히 인용해야 합니다.
어머니!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요.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은 대통령도, 정부도, 선생도, 국가도 아닌 당신에게 있습니다.
Happy Mother’s Day!
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것일 까요?
첫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안믿는 사람도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은 맞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아닌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실 의무가 없습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죄 때문에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앞에 온전한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죄에 대한 회개는 기도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도는우리로 죄짓는 것을 멈추도록 하지만, 죄는 우리로 기도하는 것을 멈추게 할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 자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때, 기도할께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 말은 어쩌면 이 시대에서, “행운을 빌을께”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고 그 안에 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서 기도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에게 매일 정해진 기도의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까? 기도 제목을 적어두고 기도하고 응답에 감사하는 노트북이 있습니까? 바나 리서치에 따르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루에 기도하는 시간은 1분 이하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평균은 5분이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따라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는 데 (누가복음 6:12), 우리가 1분 내지 5분 기도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길 바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야고보서 4:2후)
네번째는,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그의 가르침을 생각해 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로 한 가족으로 한집에 살면서 자랐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주님을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아침과 저녁식사 테이블 주위로 같아 앉아서 먹으며 대화도 나누고, 아마도 형이랑 같이 학교에도 걸어서 오가며, 자라면서 예수님이 다른 이들과 나누는 대화의 질문과 대답도 빠지지 않고 옆에서 들으며, 그삶을 통해 그분의 지혜에 대하여 집안팎에서 가장 많이 듣고 자란 사람일것입니다.
그런 생을 살아오던 야고보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인도자가 되어 교우들에게 “지혜”에 대하여 담대히 말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야고보서 3:13)'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야고보가, 담대하게, 강하게 교인들에게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행을 행하라는 명령을 하는 것을 봅니다.
지식은 우리가 배움으로 습득할수 있는 것들이지만, 지혜는 배운 지식을 얼마나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입니다. 그 지혜중의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수 있는 능력이고, 그것은 하나님에게로 부터 오는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또 그분과의 기도로 대화 함으로 깨닫고, 그뜻에 순종함으로 그 지혜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이었던 야고보의 깨달음이 부럽습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가족으로 지내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에게서 온전한 지혜를 배우고 순종하길 원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서 3:17)”
“우리의 입(혀)를 하지 말아야 할것들”
1.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들은 다른 사람을 저주 해서는 안됩니다. 저주는 악한 것이고 악의 뒤에는 악을 사주하는 사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를 저주 할때에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장 17-19
2.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한분 판단하실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남을 판단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는 교만의 자리에 앉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야고보서 4:11-12
3.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 자매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선을 행하면 안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야고보서 3:9-10
이제는 더이상 헤매지 말자
지난 몇주 중에는 유난히 어느 한 교회를 섬기시다가 (1)다른 교회로 교적을 옮기시는 분들, (2) 천주교회로 개종하시는 분들, (3) 가나안 (안나가)교회로 이적하시는 분들을 여러분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러한 분들을 만나면 그저 교리 상으로 다른 교단이나 교회를 떠나는 위험성에 대해서만 설명드리거나 우려의 표시를 했었는데, 이제는 느낄 만큼 그 분들의 입장을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는 교회나 목사나, 머물러 있는 교우들에게도 똑같은 책임이 있는것을 알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마음 아파하며 뉘우치며 기도하는것이, 그분들을 우려하거나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욱 우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교회안에서의 갈등과 이견차이는 각자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면서 사랑으로 해결하여야 합니다. 만일 부부간에 갈등이 있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 먼저 좋아할 사람은 전남편(아내)이거나 옛애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안에서 성도들간에, 또 목사와 교우들간에 갈등이 있으면 먼저 좋아할 분은 우리의 옛 두목이었던 사탄입니다.
우리가 화를내고 공격해야할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속이고 갈등을 만드는 주범자 옛 주인, 사탄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아직도 그런 속임수에 속아 넘어서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와 사랑해야 할 이웃을 물고 뜯고 있는 상황과 나의 어리석음에 한탄하고 화가 나야 맞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라디아서 5:15
주머니 안의 괴물들 (포겟 몬스터)
어린아이들은 13살이되기전에 그들의 세계관이 대부분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교회가 아이들과 꾸준히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듣고 순종하고, 진리안에서 훈련되는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아리조나 크리스챤 대학의 문화연구센터에 따르면 7가지 복음에 중심이 되는 내용을 믿는 8-12살 아이들은 단 3%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래의 7가지를 다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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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창조주이자 우주의 통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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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으로서 죄의 결과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께 의지하여 그 결과로부터 자신을 구원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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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실재하며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택에 따라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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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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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성경을 신뢰하는 이유는 성경이 전적으로 사실이며 여러분의 삶과 개인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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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옳고 그름에 대한 완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이해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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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일관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이들이 저의 사무실에 와서 예배를 기다리며, 제 사무실에 들어옵니다. 성경책을 들고 들어오는 아이들은 8명중 3명입니다. 그런데, 그 3명아이중 포키몬 카드가 든 책을 같이 갖고 들어옵니다. 포키몬 모음 바인더가 성경책 보다 훨씬 더 두껍습니다. 성경책도 예배시간에 잠깐 보고 일주일동안 무용지물 입니다.
우리의 주머니 안의 괴물들은 (포켓 몬스터)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로 모일때 성경 말씀보다 더욱 중요시하고,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시간에 잠깐 듣고 일주일동안 무용지물인 것입니까? 과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다시 한번!
귀넷 메트로 지방회 모임에 주중 저녁시간에 참석했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 모임에 꼭 참석하고 싶었던 이유중 하나는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제가 좋아하던 Fred Luter 목사님의 아들 Chip Luter 목사님 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귀넷 지방회 모임에는 대부분이 백인이나 히스패닉이고 동양인과 흑인은 별로 없었는데, 이 모임에만은 100명중 80명이상이 흑인 형제자매가 모였습니다.
젊은 목사라서 그런지 훌륭한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동의 할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했었습니다. 그분의 사역하시는 문화가 제가 매일 생각해야 되는 일들이 아니라서 그런건지, 흑인 사회에서 대하는 일상의 고민들이 제게 다가오는 것들이 아니라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아마도 제가 그분이 젊기때문에 그의 짧은 삶의 경륜(?), 경험을 약간 깔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미얀마 (Zo) 침례교회에 초대를 받아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바쁜 일정과 불편한 몸에도 특별히 초청을 수락한 이유중 하나는, 저희가 많은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듣는데, 그분들의 입장과 교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는 것을 제가 반대의 입장에서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감정이나 민족적인 편견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아직 죄의 본성은 많이 부숴져야 합니다. 매순간 자기를 생각을 부정하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생각이 들때, 이생각이 과연 끝까지 주장해야 할만한 주님이 주시는 마음인지 생각해보고, 아니라면 아무리 옳고 정당한 생각이라도 과감하게 버릴수있는 마음을 갖을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상대의 편에서 생각해 볼수 있는 여유를 갖아 보길 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접하는 문화
버마 교회 학생들과 찬양 연습을 두번째를 잘 마쳤습니다. 대부분 중학생들인데 너무도 착하고, 말도 잘 따르는 예쁜 여자 아이들만 10명 입니다. 한 학생이 8-90년대에 유명했던 밴드 Nirvana의 셔츠를 입고 있길래, 그 것이 무엇인지 아냐고 물어보니, 잘모르는듯 곧 검색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 밴드 이름 말고도 원래 단어의 뜻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열반’을 말한다 하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는 차를 기다리며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조용히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음악이 부드럽고 좋은 것 같아서 다가가서 어떤 음악을 듣고 있냐고 말을 걸었는데, 약간 뒤로 움추립니다. 몇마디 대화후 알아본즉, 노래 제목이나 가사는 일반 팝송인데, 그 노래를 부르는 밴드의 이름 (Cigarettes After Sex)이 너무 선정적인 이름 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이 그 밴드 이름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중학생으로서 많이 불편하고, 혹은 잔소리를 들을까봐 약간 뒤로 물러서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런일들은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한두번 경험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럴때마다, '아! 나는 중학교때 어떤 음악을 듣고, 또 얼마나 어른들로 부터 숨기고 지내온 것들이 많았던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쿨하게 요즘 세대를 이해한다고 받아주는척 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학생과 친하지 않아서 아쉽게도 긴 이야기는 못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한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동반자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혼 안에서의 Sex는 아름다운 것이고 얼마든지 가능한, 하나님의 설계 안에 있습니다. 물론 담배회사에서 광고를 위해 내세운 이미지 마케팅과는 전혀 다르게, 담배는 치아를 누렇게 만들고, 입에서 냄새가 나고, 무엇보다 수명을 단축 시키는 몸에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드라마와 한국 문화만 많이 접하지,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는 미국 문화 안에서 어떤 것들을 그들이 접하는지 미국에 사는 부모로서 관심을 못가질 때가 많습니다.
잠시라도 틈을 타면, 세상의 문화가 그들을 세뇌 시키는 시대가 왔습니다. 인공 지능이 얼마든지, 그들의 믿음과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세대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어던 메세지를 준비하고, 어떤 삶을 모범으로 살아야 할지, 무릎을 꿇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해야 할 시간입니다.
풍요 속의 빈곤
2주 동안 출장일들로 분주히 보냈습니다. 이번 출장과 학회에서는 예년과 달리 상당히 빠른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여러가지 놀라운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중 신기했던것은 발표자의 내용이 너무도 정확하게 동시 통역이 되어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또한 너무나도 기술적인 어려운 전문 용어도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통역되는 인공 지능의 기술이 대단 했습니다. 텔레파시로 동시 통역이 되는 시대도 아마 곧 올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돌아온 후에 토요일 미리 약속된 대로 오전 버마교회 학생들과 모여서 찬양곡들 연습을 했습니다. 버마교회 목사님이 찬양곡을 몇곡 뽑아 오셨는데, 모두가 다 70년대 찬양곡들 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본즉,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된 최근 찬양 곡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공 지능기로 번역기를 돌리면 번역은 될지 몰라도, 곡에 맟추는 가사를 만들어 놓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인공지능기를 잘 사용하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이 될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심지어는 아주 간단한 ‘위대 하신 주 (How Great is our God)’ 곡도 아직 번역을 하여 악보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를 하시는 분들중에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와 전도사, 선교사 부르심을 받고 사역지가 없으신 분들이 많은데, 버마 교회는 신학교를 마친 사역자들의 부재로 현재 많은 사역자들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이런 일들에 잘 사용되었으면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로마서 10장 14-15절
놀랄일은 아닌데 오히려 노랄 지경인 이 세상의 일들
과학 뉴스를 살피다가 놀라운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글은 시작하기를 “지구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달 초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저에게는 2023년 과학 뉴스 기사에서, 창조론을 가능성 있게 언급한 아주 드물은 기사였기 때문에 그 글의 앞부분의 묘사가 너무나도 놀랍게 쓰여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라는 단어를 쓰인것 만으로서 일반 논문에서 찾기는 힘든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글도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새로운 증거는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유기물에서 단세포 생물로, 그러한 진화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 과학자, 목사, 신학교 교수들중에서도 하나님이 오랜 세월동안 진화를 이용해 사람을 만들었을것이라고 믿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동물에서 진화를 했다면,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 이전에 많은 동물이나 유인원의 죽음이 있었고,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사람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이 아닌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원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해 죽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인본적인, 진화론적인 기사나 뉴스를 무시해버릴 수 있고 오직 믿음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얼마나 이 세대를 세뇌시키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지금 이 세대가 성경말씀을 믿는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반대로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준비하게 됩니다.
토비 맥 컨서트
토비 맥(Toby Mac)은 크리스챤 랩퍼이면 가수입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기독교학교인 리버티 대학을 나왔고, 한동안 DC Talk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토비 맥이란 이름으로 솔로로 오래 활동을 하면서 7번이나 그래미 상을 받았고 빌보드의 크리스챤 음악 부문에 1등을 한 곡들이 7개가 됩니다. 저는 저와 나이가 비슷하고 음악도 제 취향이라 예전부터 자주 들었고, 공연도 몇번 가보았습니다.
토비 맥(Toby Mac)의 공연에 지난 주말 저와 4명이 다녀 왔습니다. 다 문화 생활인 미국에서 한국계 가정안에 살아가면서 문화적으로 이런 공연을 자주 대하지 못할것 같아서 조금 우려 하기는 했습니다. 같이 간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크리스챤 뮤지션 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부모님들은 어느정도 알고 있는, 또 좋아하시는 음악이라고 하셔서 힘이 났습니다.
눈만 뜨면 자기가 원하는 컨텐츠에 무한대로 빠져서 주체 할 수 없는 대로 세상에서 인도하는 생각과 사고를 쫓아가고 있는 어린 세대에 그들의 삶속에 몇시간 안되는 경험이지만, 조금 더 다른 크리스챤 문화를 경험할수 있도록 자신들의 시간을 내준 학생들, 또 그들을 보내주신 부모님들, 또 그러한 마음들과 시간을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10,000명이 모여 크리스챤 메세지를 같이 듣고 공감한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경험이지만, 그 경험을 통하여 학생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더욱 열리고 말씀을 받아들일때 더욱 진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할수 있는 마음의 밭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대위의 공연자들을 바라보고 메세지를 듣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어린양 앞에서 구원 받은 자들은 다 그 광경을 목격할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 계시록 4:9-11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자 모임
마크와 스테이시 선교사의 집회에 약 120명 정도의 차세대 가족과 인도자들이 모였습니다. 불과 몇년전 영어 사역자 모임에 참석한 터라 오랜만에 이 지역의 영어 사역자들과 교제를 나눌 기대를 하고 참석했는데, 전혀 생각지 않은 사역자와 가족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모임에 함께해서 말씀과 기도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3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도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왕상 19:18) 이민 교회 에서 자라면서 다음세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준비를 하면서 혼자서만 씨름하는것이 아닌가 했는데, 그렇지 않고 많은 동역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을 이곳 저곳에 예비하고 계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두번째는 (지난번에 말씀드린것처럼) 부부 선교사의 섬기는 자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딸기잼을 바른 토스트를 매일 아침 준비했던 그 섬김의 꾸준한 자세가 8년이 지난 후에도 좋은 모범으로 다른 이들에게 주님을 전할수 있는 기회가 될수 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며, 섬김의 자세를 다짐합니다. 세번째는 기도 입니다. 선교사 부부의 기도와, 그 부부가 섬기는 단체가 함께 기도함과, 또 제가 그 선교사 부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또 그런 섬김을 받은 자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기도 할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심을 확신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중보해 주시는 기도를 믿습니다.
기도의 힘과 응답을 믿습니다. 오늘도 선교사님들을 기억하며 중국과 북한에 다시 문이열려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발걸음이 더욱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비전 여행 (관광)중 만난 사역자 부부
8년전 몸이 많이 아팠을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병가도 내고 휴가도 내고 해서 이곳 저곳 비젼 여행을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혹시 저의 삶속에 주님께서 다른 방향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기도하며 몇군데를 다녀 보았습니다. 사실 북경에 갔을 때에는 비젼 보다는 관광의 목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북경의 한 선교의 집에 도착했을때, 저희와 함께 도착한 씨애틀에서 온 부부가 있었습니다. 형제는 주정부의 가석방 담당관으로 오랫동안 일하던 것을 마치고, 그의 아내는 치과 의사인데 선교의 목적으로 저희와 같은날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저희의 주목적은 관광이었기에 아침이면 일어나 준비하고 나가려 바빴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아침마다 저희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식탁에 앉아서 빵에다 딸기 잼을 정성스럽게 발라주며, 또 커피와 주스도 준비해 주며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떠나는날 짐을 주차장에까지 들어준 형제는 이상하게 만큼 저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종종 아침식사로 토스트에 딸기 잼을 발라 먹을 때마다, 그 형제를 기억하며 그의 선교사로서의 사역과 사역지를 위해 잠깐이라도 기도합니다.
8년후 그 형제부부를 이틀란타에서 만날수 있을것 같습니다. 어느 한번의 비젼여행의 마지막 즈음에 스치듯 만난 형제자매를 다시 한번 볼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여행의 마지막에 주신 하나님의 응답을 다시한번, 8년후에, 새롭게 깨닫게하여 주시는 주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 40절
쿠키를 가지고 온 노엘이
지난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무실에 올라와 오후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들이 몰려와서 문을 두들겼습니다. “대왕님, 노엘이가 쿠키 드린대요!” 너무 반가와서 문을 열고 맞이했더니, 노엘이 손에는 남은 쿠기 조각,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 같은 한조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큰 조각을 친구들과 나눠먹고, 나중에 제 생각이 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노엘이는 씩씩하게 손을 내밀어 그 남은 조각을 저에게 주고 가지고 있던 봉지와 쿠키 가루가 뭍은 손을 털털 털었습니다.
몇달전만 해도, 아이들이 저를 무서워 했습니다. 몇달전 아이들이 이층에서 어른들 보호 없이 뛰어다니는것에 다칠까봐 놀라서 뛰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더니, 뛰어 다니는것에 익숙한 조그만 아이들은 저를 보면 도망가고 숨고 피했었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압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제 마음을 받아줍니다. 너무도 감사해서 이번주에는 제가 먼저 스프링클이 뿌려져있는 캔디 쿠키를 사서 노엘이에게 보답으로 주어 나눠 먹으라고 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예뻐 죽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벌을주고 엄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하시려고, 위험에서 영원한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를 멈추시려고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그래도 죽음으로 향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신것이, 그분 자신이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하시며 우리를 사랑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두려워 하는것이 아니라,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에게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요한 일서 4:18
내 그리운 나라
91년도에 한국에서 결혼한 이후에31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정확하게는 약 7년전 북경과 연변을 가는길에 한국에 약 3일정도 머문것을 치면, 이번이 두번째 였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아버지를 보좌하느라, 제가 특별히 가고 싶은곳이나, 하고싶은것을 못한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듯이 이번이 당신 삶에서 마지막 한국여행이라고 하시니, 저는 무조건 아버지의 비서가 되어 어딜 가자고 하시면 모시고가고, 무엇을 먹자고 하시면 그것을 먹고, 혼자 기다리라면 대기하고 기다리는 것이 제 2주간의 시간이었습다. 저의 생각은 제 생각을 말하지 말고 무조건 아버지가 편하신대로 하시게 해 드리자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어릴적 저를 많이 사랑해 주시던 김정옥 선생님, 임수자, 오길자, 박종안, 송태숙 권사님, 조봉래, 임유수, 이청노 장노님, 그리고 플로리다 대학에서 저를 여러가지로 이끌어 주신 유장렬, 서재명, 장동영 박사님들 등 많은분들을 다시 뵐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받은 그 사랑을 그대로 다음 세대들에게 나누어 줄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2주를 지내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많이 알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버지의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생각과 감정과,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이 왜 아버지를 존경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몇년 남지않은 당신과 당신 아내에 대한 생각들을 알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감사했습니다.
한국은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여의도의 숙소에 있었는데, 여의도만 해도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람과 습성도 달라지고, 편해진것도 많았습니다. 88년도 누나 결혼식때 한국에서 약 3개월 있었는데, 그 당시 임지훈이란 가수가 부른 노래 “내 그리운 나라”라는 노래를 많이 듣고 따라 부르며 방황도 많이 했었고, 그후 계속 ‘왜 더 기회를 만들어서 한국에 나가보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특히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래저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게 살고, 또 무엇보다 하나님에게로 부터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들을때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고, 혹시라도 내가 자주 나오거나 연락을 하면서 서로 격려를 했으면 좀 나았을려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나의 자유시간에 나는 생명의 말씀사 (기독교 서점)에 2번 갔었습니다. 몇년전 내가 읽고 적지않게 영향을 받은 ‘존 파이퍼’ 목사의 “삶을 허비하지 말라” (“Don’t waste your life”, John Piper)라는 책을 12권 구입해서 교인들에게 선물로 주고, 함께 읽고 싶어서 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지수(James)의 색시감을 소개하신다고 하셔서 (아브라함 시대도 아니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명의 아가씨를 만나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아내 지은 엄마도 이삭의 아내 리브가 처럼, 고향을 떠나 하나님만 바라고 남편이 있는 곳으로 온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삶을 허비하지 말라”의 책속에 아도니람 져드슨 선교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버마 선교사로 나가기전 자기가 사랑하는 앤과 앤의 아버지 (곧 장인어른이 될)에게 편지를 쓴 내용입니다.
같은날, 저드슨은 앤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앤 해설틴을 만난지 한달후, 저드슨은 앤에게 청혼을 하기로 했다. 저드슨은 자신의 삶이 위험하고 힘들 뿐 아니라 먼 타향살이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미국에 돌아오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33년 후 단 한 번 미국에 돌아왔을 뿐,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앤은 저드슨과 함께 버마로 떠났으며 거기서 죽었다. 다음은 저드슨이 앤의 아버지에게 앤을 선교사의 아내로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다.
“이제 감히 여쭙겠습니다. 내년 이른 봄에 따님을 보낼 수 있으신지요? 어쩌면 세상에서 따님을 다시 보실 수 없을지 모릅니다. 따님을 보내시면, 따님이 어려움과 고난이 따르는 선교사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보낼 수 있으신지요? 따님이 위험한 항해를 해야 하며, 남부 인도의 치명적인 기후를 견뎌야 하고, 모든 게 부족하고 궁핍한 가운데 살아야 하며, 무시와 모욕과 박해와 어쩌면 참혹한 죽음까지 견뎌야 하는데, 그래도 따님을 보낼 수 있으신지요? 천국의 집을 떠나 따님과 아버님을 위해, 죽어가는 불멸의 영혼들을 위해, 시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따님을 보낼 수 있으신지요? 따님을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의의 면류관을 쓰고, 따님을 통해 영원한 형벌과 절망에서 구원받는 이방인들이 따님의 구주께 올리는 우렁찬 찬양 가운데 따님을 곧 다시 만날 소망을 품고 따님을 보낼 수 있으신지요?”
앞으로 아버지, 나, 지수, 누구든지 한국에 또 갈수 있을지 스치듯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과거에 많이 못가봤다고 아쉬운 마음이나 후회스런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아니 꼭 한국이 아니어도 앞으로 어딜 자주 여행 가던지, 갈수 있던지, 가고 싶던지, 더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이 땅에 오셨던, 그리고 앞으로 오실것을 고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 가기 전 주에 과테말라 (SETECA) 최남용 목사가 세계선교대회에 강의할 내용중 중남미에 한인 이민 역사를 선교역사로 다루는 내용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을 떠난 이민자로 40년 넘게 살면서 이곳 저곳 출장과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그리고 다닐때 마다 “주님, 저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기도를 많이 했지만, 항상 나의 마음은 미국에서 자라는 나와 같이 어릴때 모국을 떠나 자라는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마음이 가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셔서 미국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로 보내신 것이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분의 선교의 도구입니다. 더러는 미국이 무슨 선교지라고 그러느냐고 말을 하지만, 저는 미국이라는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새로운 삶들이 우리의 선교대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내 그리운 나라”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하나님의 나라 라는 사실을, 또 그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역을 할수 있길 바랄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저는 인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나님 앞에 오늘도 바로 서있으려고 발걸음을 바꿉니다. 우리 각자의 기도제목과 함께, 저와 샤인 사역을 기억하며 기도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여러가지로 한국에 다녀와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직장도, 사역도, 가족도…. 무엇보다 아들 지수에 대해 기도를 많이 합니다. 부친도 여독에 고생을 하시고, 코로나로 또 두주 고생하셨지만, 지금은 온전하게 회복되셨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대로 서로 기억하고 기도하고 연락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의 피와 예수님의 피
사람의 몸의 신비는 대단합니다. 몸의 골수에서 1초에 약2백만개의 적혈구를 생성해 냅니다. 또 우리의 심장은 하루에 1500-2000 갤론의 혈액을 온 몸으로 펌프하고 있고, 생성된 적혈구는 백혈구, 혈소판과 함께 혈액으로 약 6만 마일을 혈관과 미세혈관을 돌게 됩니다.
피를 검사해 보면 우리의 몸과 건강상태를 보기도 하지만, 피를 보면 우리 창조주의 위엄과, 감탄할 만한 그 능력과 솜씨, 그 복잡하면서도 신비롭고 미묘한 놀라움 들을 알수있습니다.
새로운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서 잉태되면, 아이와 어머니를 연결하는 태줄은 신기하게도 서로에게 영양분이나 폐기물은 서로 교환 시키지만, 서로의 피는 처음부터 각각의 생명으로 독립적으로 구분이되고 서로 섞이지 않게 창조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등장하게 되셨지만, 그 생명은 우리 죄인인 모습의 인간 아버지나, 인간 어머니에게서 받은 생명이 아니고, 온전하게 죄 없는 독립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선거 시절이 되면 생각나는 정체성
대학교때… 무작정 한국에서 온 형들이 좋아서 유학생 형들을 쫓아 다니고 있을때, 저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 개표 상황을 다같이 모여서 보고 듣고 있었을때인것으로 기억합니다. 끝까지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나선 김대중, 김영삼 두후보를 누르고 국민들은 노태우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아무말 없이 바라보는 형들도 있었고, 화를 내며 속을 삭이는 형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주제넘을수도 있었지만, 형들 앞에서 한마디를 한다는 것이, “그래도, 서서히 민주주의가 잘 잡아 가겠지, 몇번의 선거가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완전에 가까운 자리잡기가 힘들겠지”라는 비스므리한 표현으로 형들있는중에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아주 친한 형중 한명이, “니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오고, 군대도 가지않고, 국적도 포기되면서 미국인이 된 저는 그 말을 제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받아들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그 당시에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쩔수 없이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온 저는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온 친구들과 고향땅, 모국을 많이고 그리워하고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그 이후로 저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행동을 잘못하면, “교포 애들은 이럴때는 미국식, 저럴때는 한국식, 자기 편한한 대로만 행동해” 라는 말을 안듣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미국사람들과 어울릴때도 “저 사람들은 나를 과연 한국사람으로 대할까? 아니면 미국사람으로 대할까? 하면서 튀지 않도록 소심스럽게 살아왔던것 같기도 합니다.
40년이 지났지만, 미국에서 자라는 저와 비슷한 배경에서 자라는 학생들을 보면 그들과 같은 상황에 있는 동질감도 느끼며, 그들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을까 하면서 걱정과 기도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이민을 간 아브라함이 새로 정착한 땅에서 태어나 이민 2세로 자라는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십칠세의 나이에 형들이 강제로 팔아서 이집트로 팔려가 서른 살이 되기까지, 부모 형제 소식을 전혀 모르고 지낸 요셉의 기록은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전혀 문화적으로 다른 바로의 왕궁에서 잘 자란 모세도 있고요. 어린 나이에 포로로 끌려 갔지만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두 정권이(나라가) 바뀌면서도 왕을 보위하는 믿음직한 다니엘의 기록이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학생들도 또 우리 모두가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나라 시민으로 갖을때 가장 든든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권, 영주권, 체류 상태, 국가, 정치, 민족, 직업이 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나라의 전능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어디에 있던지 자부심을 갖고 생활하는 우리 학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 대한민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대표들도 하나님을 잘 알고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멋진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가 되기를.
Leadership

Tim Lim
Lead Staff
tim@shineatlanta.org
Tim is a Korean-American and his parents immigrated to Jacksonville, Florida when he was 16 years old. His father has been serving as a pastor for over 55 years. Tim obtained a PhD in Chemistry from University of Florida and is currently working at CDC (Center for Disease Control) in Atlanta. Tim loves soccer, watching soccer and eating Doritos. He is married to Grace Lim for 25 years and they are empty nesters with two grown children. Tim is receiving his degree in Biblical Counseling in May 2017 and plans to enroll in a Masters of Divinity.
Grace has a heart for an authentic community and she enjoys genuine connections and fellowship. She is working as the General Manager at the First Intercontinental Bank in Doraville, GA.

Grace Lim
grace@shineatlanta.org


Wallace Shaffer
Associate Staff
wallace@shineatlanta.org
Wallace was born and raised in Indiana County, PA, also grew up in a Christian family. His birth-mother was a missionary to Japan in the early 1950’s and planted two churches. He had the privilege of visiting them in 2015. Wallace obtained a doctorate from National University of Health Sciences in Illinois and has been practicing as a chiropractor for over 20 years. He enjoys playing ice hockey, watching the Pittsburgh Penguins and eating pies and ice cream. He is married to Mary Shaffer and recently moved to Georgia in the fall of 2016. Wallace has a strong interest in apologetics and his primary spiritual gift is service.
Mary has a heart for discipleship and missions and serves as a COO for a non-for-profit organization. She enjoys meeting people from various backgrounds and all walks of life!
Mary Shaffer
mary@shinealtlanta.org
OUR MISSION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에 온전히 순종하며, 각자의 삶이 공동체와 사회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나타내도록, 이 땅에서의 그 나라를 누리며, 나누며, 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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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예배와 공예배, 기도와 말씀 묵상과 연구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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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성도간의 교제로 우리의 발끝이 다가가는 곳에서 헌신으로 섬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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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꾸준한 제자 양육을 위하여 복음을 올바로 받아 들일수 있는 좋은 토양을 만들고 씨를 뿌리는 사역을 합니다.
사역자
임 헌우
tim@shineatlanta.org
고등학교 1학년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 미국에서 자라는 이민 자녀들과 다음 세대의 어린 학생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잘 받을 수 있는 토양을 준비하고 가꾸는 사역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함께 사역할 일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 진방
james@shineatlanta.org
사랑하는 조국의 동포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할 기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기도하는 사역자 입니다.
샤인 사역의 선교, 말씀, 방송, 행정 사역을 맡고 있습니다.

